“우리의 예술적 영감은…바로 당신입니다.”

“우리의 예술적 영감은…바로 당신입니다.”

[People]은 융합예술센터 아트콜라이더랩(이하 AC랩)과 함께 한 사람들을 통해 AC랩이 추구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 예술 교육의 방향성을 소개합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당연한 듯 다가와서 해보더라고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건 됐다’ 싶었죠.(웃음)”

지난해 11월 11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내 ‘이어령예술극장’에선 특별한 포스터가 관객들을 맞았다. 작은 손길에도 화들짝 반응하며 다채로운 비주얼을 뽐내는 요란한 포스터 덕분에 극장 앞은 금세 떠들썩한 풍경이 된다. 범상찮은 포스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술 작품. 한예종 아트콜라이더랩이 ‘인터랙티브 미디어월 창작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선보인 ‘Bloom Boom Bash’라는 작품이다. 해당 작품을 제작한 김인영 작가는 “전혀 새로운 예술 경험을 통해 소통의 장을 열어가고자 했던 시도”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예술적 감각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아티스트는 김 작가를 포함해 모두 네 명. 극장을 무대 삼은 김인영(26)‧유태양(30) 작가와 더불어, ‘TRPG:TRPG’라는 XR퍼포먼스 공연을 제작한 이광현(30)‧임민재(30) 작가는 정숙한 도서관을 시끌벅적하게 바꿔놓겠다는 도발적인 포부를 기어코 실현시켰다. ‘관객이 완성하는 예술’을 탐구하는 신예 아티스트들이 미디어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속내는 무엇일까? 작가들과의 대담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자.

[2024 커넥티트위크: 열린학교 오픈 쇼케이스] 무대를 꾸민 아티스트들. 왼쪽부터 유태양, 김인영, 임민재, 이광현 작가

[Chapter.1] 사람이 궁금했던 예술학도들, XR로 헤쳐모여!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주로 어떤 예술 활동을 펼치는 지 궁금하다. 

임민재 작가(이하 임민재): “한예종 멀티미디어 영상과에서 전문사(석사) 2학년을 마치고, 기술 기반의 예술 활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가장 관심 있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이다. 관객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작업을 주로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김인영 작가(이하 김인영): “디자인, 그중에서도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는 한예종의 인터랙션 디자인과에서 전문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학부 때 심리학을 전공했던 덕분에 ‘행동유도’를 위한 디자인 작업에 특장점이 있다.”

이광현 작가(이하 이광현): “학부 때는 예술경영 전공을 기반으로 연극을 공부했다. 이후 관객들과 보다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 XR(Extended Reality, 확장현실)을 통해 퍼포먼스를 펼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VR 관련 회사에서 일하며 가상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체험형 연극을 제작하기도 했다.”

유태양 작가(이하 유태양): “XR과 인터렉션 개발자로 활동 중이다. 학부 때는 전통예술 이론을 공부했는데, 원체 컴퓨터 다루는 걸 좋아하고 ‘얼리어댑터’ 성향도 강하다보니 물 흘러가듯 XR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특히 구조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결과물을 완성하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적성에 잘 맞더라.”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예술을 펼치는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인문학적인 토대가 발견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임민재: “학부 때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넓게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작업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을 단순히 돈 버는 공부로 생각하기 쉽지만, 본질은 사람들의 욕구와 사람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분야다. 이를 예술 작품으로 치환하면 관객과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형식이 된다. 자연스레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양: “공감한다. 저 역시 처음에 공부했던 철학이 영감의 원천이다. 철학은 분명히 흥미로운 학문이었지만 ‘그래서 내가 이걸로 뭘 할 수 있지?’라는 질문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인터랙티브 아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줬다.“

김인영: “인터랙션 디자인이나 인터랙티브 아트는 사람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야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미디어 기술을 통해 구현된 셈이니 사람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영감의 원천이라 할만하다.”

관객들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하고 있는 유태양(가운데) 작가

-본인들을 XR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있다. XR아트라는 것은 무엇이며, 왜 이 분야를 선택했나?

이광현: “이제 VR(가상현실)이나 AR(증강현실)은 꽤 익숙하지 않나? XR은 이를 모두 합친 개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즉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확장하는 모든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으로 예를 들면 ‘파인드 윌리’라는 XR 연극이 대표적이다. 이 연극은 메인 테마가 ‘순간이동’이다. 하지만 연극에선 이를 표현하기 애매하고, 영화에선 관객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된다. XR을 통하면 관객이 연극에 직접 참여해서 순간이동을 해볼 수 있는 거다. 너무나 새로운 예술을 경험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임민재: “좋은 예술은 관객과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XR은 절대 관객을 멀리 두지 않는다. 1인칭 관점이어야 하고, 몰입해서 참여해야 한다. 결말 역시 관객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이 궁금해서 예술까지 하게 된 저로선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유태양: “개인적으로는 ‘정답’이 없다는 것에 먼저 끌렸다. 전통예술은 도제식 교육으로부터 비롯된 답들이 명확히 있지 않나. XR은 오히려 전인미답에 가깝다. 아직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열려있다는 얘기다. 창작자에게 이는 엄청난 기회다.”

[Chapter.2] 아트콜라이더랩은 ‘창작의 무중력지대’ 

-지난해 11월, 한예종 내 이어령예술극장과 도서관 등에서 진행됐던 전시는 한예종의 융합예술센터인 아트콜라이더랩이 기획‧진행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월 창작 프로젝트’의 마무리 무대였다.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유태양: “사실 아트콜라이랩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2018년부터 랩 자체 수업을 듣기 시작했으니 ‘지금의 저를 키운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웃음) 당시 새로운 기술이나 응용 프로그램들이 막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는데, 한예종 내에선 딱히 배울 곳이 없었다. 아트콜라이더랩이 유일한 배움터였고, 저 같은 니즈를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임민재: “저 역시 이번 쇼케이스 전에 아트콜라이더랩에서 교육을 받고, 작업도 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늘 좋았고 남는 게 많았다. 특히 사람들이 좋았다. 융합예술 씬에는 늘 좋은 사람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소통이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런데 아트콜라이더랩은 조금 다르더라.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들, 새로운 것에 저항감이 없는 아티스트들이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레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인영: “너무 공감되는 얘기다. 디자인은 다분히 개인적인 작업이고 그만큼 실패에 대한 리스크도 크다. 뭐든 혼자 짊어져야 하는 거다. 하지만 여기서 작업할 땐 그런 부담을 많이 덜 수 있다.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고, 랩 내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환경도 잘되어 있다. 회복탄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느낌이다.”

인영(사진) 작가는 “아트콜라이더랩은 협업에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아트콜라이더랩은 한예종의 미래 교육을 책임지는 연구기관으로, 기존 교육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어떤 부분이 기존과 가장 다르던가.

이광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분위기다. 기존 교육과 가장 큰 차이를 느낀 점 역시 그것이다. 랩의 분위기가 그러니, 참여하는 작가들 역시 숨겨둔 챌린지 본능을 자연스레 끄집어낸다. 결과에 대한 압박이나 실패의 두려움을 떨치고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태양: “맞다. 보통 예술 지원사업들은 원하는 결과물의 틀이 얼추 정해져있다. 이 틀은 예술가의 창의성을 가두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아트콜라이더랩은 많이 열려있다. 속된 말로 ‘삽질’도 경험이라고 지지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다. 결과에 대한 압박이 적으니 다양한 기술을 적용‧시험해볼 수 있고 이미 수없이 ‘삽질’해본 예술가들과 고민을 나누고 솔루션을 찾기도 쉽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과정을 통해 엄청나게 ‘레벨업’이 됐다고 생각한다.”

김인영: “개인적으론 ‘함께’의 가치가 빛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눈빛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비슷한 니즈를 함께 추구하고, 비슷한 고민을 나눠질 수 있다.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고립될 위험이 적고, 자연스럽게 ‘피어러닝’도 이뤄진다.” 

유태양: “동의한다. 아무래도 전통예술을 공부했었다보니 도제식 교육에 익숙했는데, 아트콜라이더랩에서 ‘피어러닝’의 의미를 깨달았고, 그 위력도 절감했다.”

임민재: “융합을 지향하는 랩의 성격에 맞게 소통이 수월하다. 개인적으론 개발자들과 대화를 하면 조금 막힐 때가 많다. 내가 설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남을 설득하지도 못하니 제자리걸음을 하는 거다. 그런데 아트콜라이더랩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더라. 전문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민하고 배려하는 사람들만 남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광현: “공감한다. 뭣보다 랩 자체의 이해도가 높다. 외부 지원사업에 참여하다 보면, 사업을 진행하는 주체가 맥락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저 트렌드를 쫒아가는 모양새랄까? 그러다보니 지원사업을 딱 받는 순간 담당자는 쏙 빠져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아트콜라이더랩은 기술적 맥락을 충분히 알기 때문에 함께 기획할 때의 태도가 많이 다르다.”

[Chapter.3] 우리의 예술은 관객의 손을 통해 매조지된다

-작품 얘기를 해보자. 이번 쇼케이스를 위해 지난해 봄부터 늦가을까지 준비했다고 들었다.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유태양: “극장이 전시 장소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극장의 역사성을 먼저 떠올렸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작품들이 그곳을 거쳤을 테니 말이다. 그 상징이 바로 지난 작품들의 포스터였다. ‘버려진 포스터에 새 생명을 부여하자’는 초기 구상으로 탄생한 것이 ‘Bloom Boom Bash’라는 작품이다. 잊힌 공연들이 다시 하나의 공연이 되는 선순환을 표현하고 싶었다.”

김인영: “초반에는 작가주의적인 요소를 세게 넣어보자는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인터랙티브 아트가 너무 생소한 장르였다. 표현 방식도 낯선데, 메시지까지 난해하면 ‘상호작용’이라는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질 것 같았다. 가장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쪽으로 포커스를 맞췄던 이유도 그래서다.”

유태양‧김인영 작가가 제작한 인터랙티브 미디어 시스템 ‘Bloom Boom Bash’

유태양: “포스터들이 쭉 보여지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또 일일이 반응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참여자의 동작에 따라 화면이 바사삭 부서지기도 하고, 휘리릭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관객들이 마음껏 장난을 칠 수도 있고, 사진촬영도 해볼 수 있는 월(wall)의 형태라고 보면 된다.” 

이광현: “우리 팀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조금 난해한 면이 있다.(웃음) 제목이 ‘TRPG’인데, ‘테라포밍 롤플레잉 게임’의 약자다. AI를 활용한 XR퍼포먼스 공연을 표방하지만,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임민재: “쉽게 설명하면 ‘테라포밍’, 즉 다른 행성으로 문명을 옮기는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가질지 겨루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총 8명이 참가하여 2명이 한 조로 생태‧공학‧사회‧건축 등의 분야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관객들을 설득하여 끝까지 살아남는 게 목표다. 예를 들어 생태를 고른 팀이 승리하면 그 행성의 문명은 생태환경을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는 식. 그야말로 새로운 지구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을 담고 있다.”

이광현: “사실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게임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참여하고, 체험하고, 즐기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도서관에서 전시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일단 도서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자’는 구상을 했다. 소위 ‘합법적 해킹’을 시도한 것이다.”

임민재: “새로운 행성, 새로운 우주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담고 있다. 우리 작품은 결국 욕망을 탐구하는 게임이다. 도서관이란 공간의 특성과 잘 어울리지 않나.(웃음)”       

‘TRPG:TRPG’에 참여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

-상호작용을 목표로 하는 참여형 예술인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궁금하다. 

김인영: “극장은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긴장이 제법 됐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심을 보이고, 당연하다는 듯 참여하는 걸 보면서 ‘UX만큼은 대성공이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었다.”

이광현: “개인적으로 XR아트는 작품을 관람하는 것보다 관람하는 관객들을 보는 것이 더 흥미롭다. 관객들이 창작자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의외성이 주는 흥미로움이 있는 거다. 이번에도 그런 부분을 새삼 느꼈다.”

임민재: “애초에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열어둔 작품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다. 관객들이 우리가 짜놓은 틀 안에서 치열하고 첨예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걸 보면서, ‘아, 이래서 관객과 함께 만드는 예술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있었다.”

이광현: “관객이 완성하는 작품이라는 얘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 작품은 두 번에 나눠 진행했는데, 실제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앞뒤 차수에 공연 내용이 대폭 바뀌기도 했다.”        

관객들에게 TRPG: TRPG’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광현(뒷모습) 작가

– 해당 쇼케이스의 참여 경험을 통해 각자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임민재: “사실 이번 작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험난했다. 세계관을 정립하고 관객 반응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롤북까지 따로 만드는 등 작업량도 꽤 많았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덕분에 과정 하나하나의 의미와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다. 결과에만 집착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유태양: “매번 느끼지만 아트콜라이더랩의 작업은 나를 훌쩍 성장시킨다. 망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기 때문이다. 망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숨기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마주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잘 보인다. 이번 작업 역시 길을 잃는 순간이 많았지만 결국 끝까지 왔고, 이를 통해 충분히 성장했다고 믿는다.”

김인영: “무엇보다 좋은 동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융합예술가로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융합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기회였다.”

/  글  최태욱 기자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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