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은 융합예술센터 아트콜라이더랩(이하 AC랩)과 함께 한 사람들을 통해 AC랩이 추구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 예술 교육의 방향성을 소개합니다. |
“테크닉보다 중요한 건 음악에 대한 너른 이해도에요.”
이정면(56) 이음사운드 대표가 말하는 녹음의 정수다. 14년 간 녹음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해온 사운드 엔지니어지만, 기술적 완성도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적 소양은 물론, 음악사, 음악 심리 같은 주변 학문까지 두루 섭렵했던 이유다. 녹음에 대한 철학은 이내 예술에 대한 철학으로 확장된다.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예술적 테크닉 위에 다양한 소양들을 켜켜이 쌓아 올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정면 대표는 “연주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면, 테크닉 너머의 것들도 필요하다”면서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사고의 확장이 수반돼야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이 완성되고, 보다 다양한 기회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의 커넥티드캠퍼스 사업을 통해 ‘창작연희실기연습’이라는 수업을 선보였던 이유도 그래서다. 엘리트 예술학도들의 다양한 경험과 그 속에서 빚어지는 ‘이유 있는 불협화음’을 통해 얻고자 했던 건 세계관의 확장, 그리고 예술적 배려다.

이정면(사진) 이음사운드 대표
| 기타 치던 공대생이 녹음실 주인장 되기까지
이정면 대표는 작곡가 출신이다. 그것도 동‧서양을 아우르는 음악인이었다. 대학에선 서양음악을, 대학원에선 국악을 전공했던 덕분이다. 학교를 떠나 가장 오래 적을 두었던 곳은 ‘국립국악원’.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9년 동안 작‧편곡을 도맡는 음악가로 활동했다. 날 때부터 음악인 같지만 의외로 늦깎이다. 공대 출신으로 관련 직장에서 사회생활도 제법 했단다.
“음악은 어릴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공대 시절에는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랑 베이스를 치기도 했죠. 그런데 음악을 하면 할수록 ‘이게 진짜 내 길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결국 그 갈증을 참지 못한 거죠.”
단순한 호기심이라기엔, 꽤나 필사적이었다. 결혼까지 한 상태에서 음대 진학을 다시 준비했을 정도니 말이다. 갈증을 풀어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대표는 “어떻게 하다 보니 음대만 10년을 다녔다”고 회상했다. 그 과정에서 클래식, 국악은 물론 대중음악에 동요까지 섭렵했다.
녹음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국악원 시절부터였다. 작곡 작업 차 녹음실을 들락날락거리면서 흥미가 배가됐던 것. 작은 관심은 이내 원대한 목표로 바뀌었다. 전환과 융합에 익숙한 예술적 토양에 공대생 출신의 기술 친화력까지 더해지자 그의 비전은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엔 그저 작곡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공부했어요. 레코딩 프로듀싱이나 사운드 엔지니어링 같은 기술을 틈틈이 익혔죠. 그런데 알면 알수록 재밌는 거예요. 슬그머니 새로운 기회도 엿보였고요.”
음악가의 삶을 접고, 직접 운영하게 된 녹음 스튜디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정은 이 대표의 음악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클래식, 재즈, 국악, 대중음악 등 장르 구분 없이 녹음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 예술에 대한 사고가 확장됐던 것. 이 대표는 “다양한 장르의 연주자를 만나 함께 일하다보니, 장르에 대한 공부가 저절로 되더라”면서 “그들의 고민과 고충을 듣고 이를 해결해 가면서 해당 장르, 나아가 예술 전체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고 덧붙였다. 악보의 사각지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마주한 셈이다.

이정면(사진) 대표는 “녹음은 그야말로 종합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봄, 한예종 전통예술원에서 진행된 ‘창작연희실기실습’은 그가 예술 커리어 내내 시도했던 융합과 확장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수업이다. 예술 교육의 디지털 전환과 융합을 고민하는 학교 부설기관 ‘아트콜라이더랩’과 함께 미래 교육의 방향성과 가능성을 모색해 본 시간. 이 대표는 “사고가 유연해지고 나아가 확장되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면서 “연주밖에 모르는 친구들에게 연주 이외의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 장구 잡던 손에 쥔 슬레이트…예술 밖에서 예술을 만나다
한예종 전통예술원의 ‘창작연희실기실습’(3학년 1학기)은 일종의 콘텐츠 제작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무속 팀, 농악 팀, 사물 팀 등으로 구성된 학생 15명이 직접 연주나 연극 등의 요소가 포함된 ‘연희(演戲)’를 창작하여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보는 과정. 방점이 찍히는 지점은 ‘직접’이다.
“모든 미션을 학생들 스스로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것이 핵심이에요. 관련 영상들을 뒤지며 레퍼런스를 찾고, 영상 기획을 하고, 스토리보드도 만들었죠. 녹음, 촬영, 편집 같은 작업도 학생들이 직접 합니다. 결과물이 조악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만듦새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모두 직접 해냈다는 게 의미있는 거죠.”
해당 수업은 의도하는 바가 명확하다. 연주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빼곡 차있는 한예종 학생들이 ‘연주 이외의 것’도 고민해보고 관심을 갖기를 바란 것. 이 대표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교 커리큘럼만 따라가기도 벅찬 게 한예종 학생들의 현실”이라면서 “자연스레 특정 분야에 매몰돼 타 장르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자칫 엘리트 교육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우려도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다 실질적인 목표도 있다. 미디어 표현이 일상화 된 시대, 특히 예술가로서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영상 작업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하는 차원. 소위 선행학습의 역할이다. 이 대표는 “장비에 대한 이해, 관련 용어 습득, 다양한 역할과 그들의 애로사항 등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좌충우돌하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협업 과정은 분명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귀한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있지만 답은 없는 수업 방식은 학생들의 참여도를 드높였다. 오디오나 비디오 기술 분야의 원포인트 멘토링만 있을 뿐, 최종 결과물은 오롯이 학생 스스로 책임지는 과정. 이 대표는 “나도 잘 몰라, 너희들이 어떻게든 해봐”라는 오묘한 가르침으로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북돋았다.
“현장에서 슬레이트치며 ‘레디, 고’를 외치던 학생 얼굴이 기억나요. 굉장히 열정적인 모습이었죠. 실제로 무슨 단계든 학생들이 준비를 엄청 많이 해왔어요. 마이크의 수음 원리나 카메라 조작법, 현장 촬영 기술 등을 따로 배울 땐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많이 묻기도 했고요.”
이 대표는 수업 중 어느 학생에게 ‘향후 녹음실 전망’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저 개인적인 관심일 수도 있지만, 이 대표에겐 그조차 의미가 남다르다. 악보에만 고정돼있던 시선이 곁눈질을 시작했다는 작은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고의 확장을 의미하고, 그것이야말로 이 수업이 바라는 최종적인 목표다.
| 배려는 이해로부터, 이해는 경험으로부터
사실 예술가들에게 협업은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최고의 표현 주체를 꿈꾸는 예술학도의 협업은 공대생들의 조별과제와는 자못 느낌이 다르다. 음악, 미술, 영상 등 타 장르 간은 물론, 음악 장르 하나 안에서의 어우러짐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정면 대표는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콕 집어 말한다.
“음정‧선법 관계가 전혀 다른 클래식과 국악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면 부딪칠 수밖에요. 출발점이 다르고, 각각의 특성이 어떻게 진화돼왔는지를 알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거든요. 천장이 낮고, 방이 작은 우리 문화 때문에 국악에서 앉아서 연주하는 악기가 발전된 것처럼요.“
현재 아트콜라이더랩과 이정면 대표가 함께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에 집착하는 교육이 아니라, 서로 부대끼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입장 차를 깨닫는 과정에 대한 연구다.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정확히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커넥티드 캠퍼스를 통한 교육은 예술가들이 배려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자신의 예술관을 미래 교육에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스스로 고추장이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예종 학생들이 최고의 예술 인재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들이 더 의미 있는 시너지를 내주길 바라는 것도 그래서죠. 아주 잘 지은 밥, 최고 등급의 고기, 유기농 채소와 나물이 한데 있기만 해선 비빔밥이 완성되진 않잖아요. 그들이 조화로이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고추장 혹은 참기름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의 역할은 그저 고추장 정도가 아닐까요?(웃음)”
/ 글 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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