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은 융합예술센터 아트콜라이더랩(이하 AC랩)과 함께 한 사람들을 통해 AC랩이 추구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 예술 교육의 방향성을 소개합니다. |
소리는 흘러간다. 잠시만 무심해도 놓쳐 버린다.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귀를 쫑긋한다. 그 순간, 모든 감각이 집중되고 몰입도는 최고조에 이른다. 즉각적인 몰입과 적극적인 감각 참여라는 소리의 특징을 십분 활용한 예술 분야가 있다. 소리만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예술인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다. 소리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메시지와 감각의 경계를 허무는 미학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김준(49) 작가는 이 매력에 흠뻑 빠진 예술가다. 미디어 아티스트로 출발했지만, 사운드스케이프 작가로 노선을 굳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함의가 담긴 소리를 캐치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펼쳐낸다. 자연의 소리부터 미세한 진동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청각적 신호는 모두 그의 작업 재료가 된다.
지난해 5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AC 아카데미에서 진행됐던 ‘사운드스케이프 워크샵 및 전시’는 작가가 느낀 소리 예술의 매력을 한예종의 젊은 창작자들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뒤죽박죽 혼재된 소리에서 자신만의 것을 포착하고, 거기에 각자의 경험과 기억, 감정을 녹이는 10주간의 여정은 그 자체로 예술 인생의 축소판이다.

김준(사진) 사운드스케이프 아티스트
| 눈으로 보던 세상에서, 귀로 듣는 세상으로
김준 작가의 세상은 꽤나 소요스럽다. 무심코 흘러가는 작은 소리도 허투루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소리를 탐구‧채집하고, 이를 작가의 필터로 걸러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다. 한 주제의 전시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대장정. 그런 전시를 일 년에 예닐곱 번이라 벌일 정도니, 그야말로 소리로 꽉 차있는 삶이다.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방송국에서 사진‧영상 기자로 일할 때만해도 시각이 지배하는 삶이었다. 김준 작가는 “학창시절부터 사진 동아리를 하며 학교 화보를 찍으러 다닐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영상도 다루게 됐다”고 회상했다. 방송국 일에 회의를 느껴 독일(베를린예술대학) 유학길에 오를 때만해도 맥락은 비슷했다. ‘사진을 더 심오하게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미디어 아트를 택했는데, 세부 전공에서 사운드 아트를 접하곤 말 그대로 귀가 번쩍 뜨였다.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꽤 오랫동안 시각 미디어를 다루다보니, 알게 모르게 권태로워진 것도 있을 거예요. 시각적 자극인 대세인 세상에서 온전히 소리로 구성된 세계를 창조한다는 부분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사운드스케이프 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건 2012년. 7년여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시점이다. 사운드스케이프 분야에 관해선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김 작가는 10년 간 묵묵히 자신만의 소리 세상을 채워나갔다. 공공장소에서 발견한 전자기파를 폭로했던 ‘피드백 필드’(2012, 독일 베를린), 쓰레기 위에 세워진 공원이라는 부조리를 다양한 소음으로 표현했던 ‘가공된 정원’(2013, 난지도), 분단의 아픈 현실을 중첩된 소리 정보로 각인시켰던 ‘혼재된 신호들’(2015, DMZ), 새벽 도시의 소음을 통해 일상의 낯섦을 지각시켰던 ‘상태적 진공’(2018, 청계천) 등이 그의 주요 작품. 기자 출신 아티스트라는 배경답게 그의 작업은 사회고발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일상의 노이즈에서 불편한 진실을 포착하고, 작가의 인문학적 관점을 녹여 시적‧미학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가장 ‘김준스러운’ 스타일을 완성시켰고, 지난 2018년, 사운드 아트 작가로선 처음으로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하며 예술적 완성도를 공인받기도 했다.

사운드스케이프 워크샵 연계 전시 ‘공유지 Commons_’ 현장에서 작품 설치를 하고 있는 김준 작가(오른쪽)
눈요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뚝심 있게 소리의 미학을 탐구해 온 김준 작가. 10년 여 동안 그를 지탱해 온 힘은 자기 작업에 대한 애착과 집중력이다. 작가는 “소리를 다루는 작업은 워낙 예민하면서도 할수록 빠져드는 특징이 있다”면서 “작업에 대한 몰입과 애착은 빨리 다음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한예종에서 진행한 ‘사운드스케이프 워크샵 및 전시’에서 학생들과 가장 공유하고 싶었던 메시지 역시 바로 이 대목이다.
| 노이즈가 예술? 전혀 새로운 예술적 감각을 위해
‘사운드스케이프 워크샵 및 전시’는 한예종 융합예술센터 ‘아트콜라이더랩’의 자체 교육프로그램인 AC-아카데미로 마련된 시간이다. 전공과 상관없이 교내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 이번 워크샵을 기획한 아트콜라이더랩의 정순영 연구원은 “영상원, 미술원, 음악원 등 모든 전공들을 아우르기에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10명의 학생들이 6대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으며, 심지어 이론과 학생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론과 기술에 철학과 미학까지 겸비해야 하는 심오한 작업. 만듦새에 집착하기에 10주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김준 작가는 “주요 장비 소개부터 시작해 기획, 녹음, 전시까지 전체 과정을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진행했다”면서 “작품 퀄리티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최종 결과물까지 도달해보는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꽤 생소한 분야임에도 워크샵 열기는 뜨거웠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커다란 붐 마이크를 들고 학교 주변 이곳저곳으로 소리를 채집하러 다녔을 정도. 흥미로운 것은 소리의 탐구라는 작업을 통해 창작자 고유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발휘됐다는 부분이다.
“새에 꽂혀있는 학생이 있었어요. 모든 새의 이름을 다 알 정도로 조예가 깊죠. 그 친구는 저어새 소리를 따겠다고 철새 도래지까지 가더라고요. 이론을 전공하고 있던 한 학생은 원형으로 둘러싸인 스피커 한 가운데서 본인이 집필한 책을 읽는 전시를 펼쳤어요. 심오하죠?(웃음) 이 작업이 그런 매력이 있어요. 창작자의 경험과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감상자 역시 자신의 기억과 느낌에 따라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죠.”
예민하게 접근하고 뜨겁게 몰입하는 특유의 작업 과정은 학생들의 비포-애프터를 명확하게 바꿔놓았다. 김 작가가 강조했던 창작에 대한 애착이 발동한 것. 작가는 “처음에는 ‘뭐지’하던 학생들도 말미에는 눈빛이 달라져있더라”면서 “참가 학생 중 한 명은 워크샵 이후 아예 미술원으로 부전공을 바꾸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작은 소리가 누군가에겐 삶을 바꾸는 외침이 될 수 있는 매력. 사운드스케이프가 가진 독특한 예술적 가치다.
|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예술 역시 그렇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지난 10년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소리에 대한 예술적 탐구는 고되고 외로운 작업이지만, 노력에 대한 보상은 빈약했다. 시각 매체가 주류인 국내 예술씬에서 그의 작업은 주목받지 못했고, 삶이 팍팍한 대중들은 작가가 전하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김준 작가는 개의치 않았다. 소리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사운드스케이프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쉬운 작업은 아니에요. 미술적인 기반 위에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눈을 확고히 갖춰야 하니까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야 하지만, 기술에 매몰되지 않는 인문학적 소양과 미학에 대한 탐구 정신도 필요하고요. 쉽게 확산되지 못했던 이유도 그래서겠죠.”
김 작가가 설명한 사운드스케이프의 필요충분조건은 미래 예술 교육의 방향성과 궤를 같이 한다. 예술의 토대 위에서 창작자의 철학을 단단히 하고,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인문학과 미학을 탐구하는 과정은 아트콜라이더랩이 전개하고 있는 미래 교육 실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 작가가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사운드스케이프의 전 과정을 경험해보길 권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공유지 Commons_’ 에 전시되었던 김준 작가 작품 ‘마지막 시간, 다시 찾은 공간’. 김준 작가는 “예술가에겐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최근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사운드스케이프의 관심이 시나브로 높아지는 분위기다. 국내에서 미대를 졸업한 후 해외에 나가 사운드 아트를 전공하고 오는 청년들이 크게 늘었다고. 홀로 외로운 사투를 펼쳐왔던 김준 작가로선 반가운 대목이다. 김 작가는 “젊고 유망한 작가들이 관객과 본격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저변이 늘면서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분야가 가진 잠재력이 폭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사운드스케이프는 고정 관념을 탈피하는 장르에요. 기존의 시각적 형태나 음악적 형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죠. 그 자체로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얘기입니다. 덕분에 관객들에게 새로운 예술 감상 경험을 선사할 수 있고요. 화려한 것, 물론 좋죠. 하지만 모두가 화려함만 추구할 순 없잖아요. 예술은 더더욱 그러면 안 되고요.“
/ 글 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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